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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민문학집

지은이노상래 김양선 옮김

출판일2015-01-20

쪽 수262

판 형신국판

I S B N978-89-7581-500-3 93810

판매가1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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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국민문학집』은 조선문인협회 이름으로 발간된 처음이자 마지막 선집1939년에 결성된 조선문인협회가 1943년 1월 발간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본어로 세상에 내놓은 선집을 번역한 책이다. 당대의 역사적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중어문학 연구자에게는 매우 좋은 연구텍스트이다. 아울러 공백지대로 남아있던 일제말기 한국문학사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한국소설문학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또한 독자들은 이 선집의 작품 속에서 당시 문인들의 고뇌와 시대적 분위기를 접할 수 있다. 민족 반역이라는 불안함을 애써 감추고 있지만, 가끔 엄습하던 검은 손의 존재를 읽어 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부끄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손에 올려놓고 만져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선집의 번역출판은 가치를 지닌다.‘문단의 일본어화 촉진’ ‘문인의 일본적 단련’ ‘작품의 국책 협력’ 등의 실천 요강을 이행한 결과물 조선문인협회는 ‘시국 하 문필보국(文筆保國)’, ‘내선일체 수행’, ‘황국(皇國)의 신문화 창조’라는 기치 아래 결성된 어용문학단체이다. 이 단체가 결성된 것은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총력전 양상을 띤 시기로서, 모든 전선에서 전쟁 승리를 위한 새로운 정신 무장이 필요했다. 이 속에서 신동아 건설과 신문화 창조라는 시대적 요구가 문인들에게 시대적 과업으로 떠올랐다. 조선문인협회의 결성은 이런 시대적 요구에 대한 부응이었다. 조선문인협회는 1942년 9월 5일 ‘문단의 일본어화 촉진’, ‘문인의 일본적 단련’, ‘작품의 국책 협력’, ‘현지 작가 동원’ 등의 실천 요강을 채택하였는데, 이 선집은 이와 같은 실천 요강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물이다.조선인 작가 작품 7편, 일본인 작가 작품 2편이 일본어로 실려 있던 것을 한글로 번역조선인 작가의 작품 7편, 일본인 작가의 작품 2편 등 9편이 일본어로 실려 있다. 「산사의 사람들(山寺の人々)」(이광수), 「문서방(文書房) -미야무라(宮村) 제7화-」(이무영), 「청량리 근처(淸凉里界隈)」(정인택), 「오왕도(吳王渡)」(타나카 히데미츠(田中英光)), 「남곡선생(南谷先生)」(유진오), 「아버지의 발을 내리고 -박 선생의 일-」(미야자키 세이타로(宮崎淸太郞)), 「배 안에서(船の中)」(조용만), 「민며느리(ミインメヌリ)」(아오키 교(靑木洪)), 「동쪽으로의 여행(東への旅)」(牧洋) 등이다. 「민며느리」를 제외하면 모든 작품이 처음부터 일본어로 창작되었다. 즉, 조선문인협회의 실천 요강에 충실한 작품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차례

제1장 산사의 사람들(山寺の人々)‧이광수(李光洙) 

제2장 문서방(文書房) -미야무라(宮村) 제7화-‧이무영(李無影) 

제3장 청량리 근처(淸凉里界隈)‧정인택(鄭人澤) 

제4장 오왕도(吳王渡)‧타나카 히데미츠(田中英光) 

제5장 남곡선생(南谷先生)‧유진오(兪鎭午) 

제6장 아버지의 발을 내리고 -박 선생의 일-‧미야자키 세이타로(宮崎淸太郞) 

제7장 배 안에서(船の中)‧조용만(趙容萬) 

제8장 민며느리(ミインメヌリ)‧아오키 교(靑木洪) 

제9장 동쪽으로의 여행(東への旅)‧목양(牧洋) 

책속으로

‘어떤 의미에서 일단 문제가 된 것들’로 ‘오늘을 대표하는 조선문학’으로 보아도 좋다. ‘문제가 된 것’이라는 말은 시국을 가장 잘 호흡한 작품이라는 말이며, 시국에 부응하는 작품들 중 엄선하여 실었기 때문에 ‘조선문학의 대표작’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선집의 발간은 단결하여 흥아(興亞)의 문화 추진을 위해 협력하고자 애쓴 결과이지만, ‘시국의 급진전’이라는 외적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즉 조선문학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외적 요인을 수렴한 결과 이 선집이 발간되었던 것이다. 그 외적 요구란 구체적으로 일본어로서의 글쓰기이며,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의 태도였다.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의 태도란 ‘씩씩한 일본의 신문화 건설 방향에 발맞추어 반도의 문화나 문단’도 궤를 같이 해야 함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애국주의였다. 결국

저자소개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 이광수)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도쿄 메이지(明治)학원 중학부를 거쳐, 와세다(早稻田)대학 철학과 졸업. 일찍부터 문학운동에 뛰어들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정」 「유정」 「개척자」 「흙」 「그의 자서전」 「사랑」 「세조대왕」 「단종애사」 등 20여권에 달하는 장편, 약간의 단편, 시가, 평론 등 다수를 발표하였다. 그 외에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 조선문인협회장 등을 역임하였다.이무영(李無影)1908년 1월, 때마침 일어났던 동학란을 피하여 모친 홀로 충청북도압동(鴨洞)의 산 속에서 출산하였다. 서울의 휘문중학을 4학년에 중퇴한 후 그 외의 학력은 없다. 18세 때에 가토 다케오(加藤武雄) 선생님의 제자로 들어가 여러 해를 지내는 동안 선생님에게서 농민문학의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초등학교 대용(代用)교원, 동아일보 기자, 경성보육학교 강사 등을 지냈으며, 1927년 「두 개의 훈시」를 발표한 이래 장편 「먼동이 틀 때」 외 1, 단편집 「취향」등이 있다. 그러나 아직 일본어로 발표한 작품은 없다. 현재 경성부외(府外)에 거주하면서 창작에 정진하고 있다.정인택(鄭人澤)1909년 경성 안강정(安岡町)에서 이조의 시종(侍從) 정운복의 2남으로 태어났다. 경기중학 졸업, 경성제대 예과 중퇴 후 3년 정도 동경에서 지냈다. 1930년 중앙일보의 신년현상소설에 「준비」로 2등에 당선되었으며, 이후 20여편이 넘는 단편을 썼다. 문학잡지 기자 등을 거쳐, 현재 매일신보 기자, 동사에서 발간하는 「화문(和文)주간」 「국민신보」를 편집하면서 창작에 정진하고 있다. 다나카 히데미츠(田中英光)1913년 1월 10일 도쿄시 아카사카(赤坂)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와사키 이데시게(岩崎英重)로 호는 쿄센(鏡川)이며 사료편찬자였다. 쇼난(湘南)중학을 거쳐 1935년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졸업, 같은 해 5월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에서 살고 있다. 중일전쟁 때에는 2번이나 응소(應召)한다. 1940년 9월 「문학계」에 「올림푸스의 과일(オリムポスの果實)」을 발표하며, 1941년 1월 이케타니 신사부로(池谷信三郎)상을 수상한다. 그 외에 장편 「우리는 바다의 아들」이 있다. 현재 조선문인협회 및 일본문학보국회원.유진오(兪鎭午)1906년 경성 태생. 경기중학교를 거쳐 1929년 경성제국대학 문학부 법학과 졸업 후 동학과의 조교 및 예과 강사를 역임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대학 교수 및 법학과 학과장 역임하였다. 대학 졸업 전후로 창작 논평 등을 발표하였으며. 장편 「화상보(華想譜)」, 단편집 「봄(春)」「유진오 단편집」 등이 있다. 최근「남곡(南谷)선생님」등 약간의 일본어 창작물 발표하였으며, 현재 조선문인협회 문학부 상임간사이다. 미야자키 세타로(宮崎清太郎, 본명 : 코다마 킨고(兒玉金吾)1904년 히로시마(広島)현 토요타(豊田)군 미나미가타(南方)촌에서 태어났다. 동경제국대학 문학과를 졸업한 후, 수년 전부터 조선에 와서 현재는 경성 시내의 모 사립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한편 창작에도 정진하고 있다. 소설「아버지의 발을 내리고(父の足を下げて)」「아이와 함께(子と共に)」등을 비롯하여 시나 단가 등도 다수 있다.조용만(趙容萬) 1909년 경성 태생, 1927년 경기중학교 졸업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문학예과 입학하여, 1932년 경성제국대학 영문학과 졸업 후 매일신문사 학예부에 입사하였다. 1936년 학예부장으로 승진 후 1940년 3월 매일신문사를 퇴사하였다. 1940년 6월 편집국 위탁으로 재입사 후 사진순보(寫眞旬報) 편집 위촉을 받았다. 1932년 이후 경성욱의전(京城旭醫專) 영어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현주소는 경성 원서(苑西)동 86-10호.아오키 히로시(青木洪)1908년 황해도 태생으로 어려서 부친을 잃고 가난하여 학교는 2년 밖에 못 다녔다. 애보기, 상점 종업원 등 유소년기부터 남의 집살이를 했다. 이민 집단을 따라 만주로 들어와 일본영사관의 보이, 학교 소사, 시계방 견습생, 마침내는 청진(淸津)에서 막노동까지 하면서 미장일을 배웠다. 미장이 일만은 지금도 수준급이다. 십 수 년 전에 일본으로 건너와 규슈(九州), 오사카(大阪), 동경에서 미장이로 일하면서 문학을 공부했다. 작년 제일서방(第一書房)에서 낸 「밭을 가는 사람들(耕す人々の群)」등이 있다.마키 히로시(牧洋, 이석훈)1907년 평안북도 정주(定州) 태생으로, 평양2중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러시어문학과를 중퇴하였다. 1926~7년 무렵부터 경성일보, 부산일보 등에 일본어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9년 동아일보 신춘 현상 문예부분에 희곡이 당선된 것을 계기로 조선어 창작에 정진하였다. 조선어와 일본어로 된 약 5, 60편의 단편소설과 약간의 희곡을 완성하였다. 그 사이 오사카(大阪)매일신문 통신원, 조선방송협회 아나운서 등을 거쳐, 현재 조선문인협회 상임간사, 녹기(綠旗)일본문화연구소 소속으로 저서로는 창작집 「황혼의 노래(黄昏のうた)」등이 있다. 옮긴이노상래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서평

책소개

『조선국민문학집』은 조선문인협회 이름으로 발간된 처음이자 마지막 선집1939년에 결성된 조선문인협회가 1943년 1월 발간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본어로 세상에 내놓은 선집을 번역한 책이다. 당대의 역사적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중어문학 연구자에게는 매우 좋은 연구텍스트이다. 아울러 공백지대로 남아있던 일제말기 한국문학사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한국소설문학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또한 독자들은 이 선집의 작품 속에서 당시 문인들의 고뇌와 시대적 분위기를 접할 수 있다. 민족 반역이라는 불안함을 애써 감추고 있지만, 가끔 엄습하던 검은 손의 존재를 읽어 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부끄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손에 올려놓고 만져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선집의 번역출판은 가치를 지닌다.‘문단의 일본어화 촉진’ ‘문인의 일본적 단련’ ‘작품의 국책 협력’ 등의 실천 요강을 이행한 결과물 조선문인협회는 ‘시국 하 문필보국(文筆保國)’, ‘내선일체 수행’, ‘황국(皇國)의 신문화 창조’라는 기치 아래 결성된 어용문학단체이다. 이 단체가 결성된 것은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총력전 양상을 띤 시기로서, 모든 전선에서 전쟁 승리를 위한 새로운 정신 무장이 필요했다. 이 속에서 신동아 건설과 신문화 창조라는 시대적 요구가 문인들에게 시대적 과업으로 떠올랐다. 조선문인협회의 결성은 이런 시대적 요구에 대한 부응이었다. 조선문인협회는 1942년 9월 5일 ‘문단의 일본어화 촉진’, ‘문인의 일본적 단련’, ‘작품의 국책 협력’, ‘현지 작가 동원’ 등의 실천 요강을 채택하였는데, 이 선집은 이와 같은 실천 요강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물이다.조선인 작가 작품 7편, 일본인 작가 작품 2편이 일본어로 실려 있던 것을 한글로 번역조선인 작가의 작품 7편, 일본인 작가의 작품 2편 등 9편이 일본어로 실려 있다. 「산사의 사람들(山寺の人々)」(이광수), 「문서방(文書房) -미야무라(宮村) 제7화-」(이무영), 「청량리 근처(淸凉里界隈)」(정인택), 「오왕도(吳王渡)」(타나카 히데미츠(田中英光)), 「남곡선생(南谷先生)」(유진오), 「아버지의 발을 내리고 -박 선생의 일-」(미야자키 세이타로(宮崎淸太郞)), 「배 안에서(船の中)」(조용만), 「민며느리(ミインメヌリ)」(아오키 교(靑木洪)), 「동쪽으로의 여행(東への旅)」(牧洋) 등이다. 「민며느리」를 제외하면 모든 작품이 처음부터 일본어로 창작되었다. 즉, 조선문인협회의 실천 요강에 충실한 작품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차례

제1장 산사의 사람들(山寺の人々)‧이광수(李光洙) 

제2장 문서방(文書房) -미야무라(宮村) 제7화-‧이무영(李無影) 

제3장 청량리 근처(淸凉里界隈)‧정인택(鄭人澤) 

제4장 오왕도(吳王渡)‧타나카 히데미츠(田中英光) 

제5장 남곡선생(南谷先生)‧유진오(兪鎭午) 

제6장 아버지의 발을 내리고 -박 선생의 일-‧미야자키 세이타로(宮崎淸太郞) 

제7장 배 안에서(船の中)‧조용만(趙容萬) 

제8장 민며느리(ミインメヌリ)‧아오키 교(靑木洪) 

제9장 동쪽으로의 여행(東への旅)‧목양(牧洋) 

책속으로

‘어떤 의미에서 일단 문제가 된 것들’로 ‘오늘을 대표하는 조선문학’으로 보아도 좋다. ‘문제가 된 것’이라는 말은 시국을 가장 잘 호흡한 작품이라는 말이며, 시국에 부응하는 작품들 중 엄선하여 실었기 때문에 ‘조선문학의 대표작’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선집의 발간은 단결하여 흥아(興亞)의 문화 추진을 위해 협력하고자 애쓴 결과이지만, ‘시국의 급진전’이라는 외적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즉 조선문학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외적 요인을 수렴한 결과 이 선집이 발간되었던 것이다. 그 외적 요구란 구체적으로 일본어로서의 글쓰기이며,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의 태도였다.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의 태도란 ‘씩씩한 일본의 신문화 건설 방향에 발맞추어 반도의 문화나 문단’도 궤를 같이 해야 함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애국주의였다. 결국

저자소개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 이광수)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도쿄 메이지(明治)학원 중학부를 거쳐, 와세다(早稻田)대학 철학과 졸업. 일찍부터 문학운동에 뛰어들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정」 「유정」 「개척자」 「흙」 「그의 자서전」 「사랑」 「세조대왕」 「단종애사」 등 20여권에 달하는 장편, 약간의 단편, 시가, 평론 등 다수를 발표하였다. 그 외에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 조선문인협회장 등을 역임하였다.이무영(李無影)1908년 1월, 때마침 일어났던 동학란을 피하여 모친 홀로 충청북도압동(鴨洞)의 산 속에서 출산하였다. 서울의 휘문중학을 4학년에 중퇴한 후 그 외의 학력은 없다. 18세 때에 가토 다케오(加藤武雄) 선생님의 제자로 들어가 여러 해를 지내는 동안 선생님에게서 농민문학의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초등학교 대용(代用)교원, 동아일보 기자, 경성보육학교 강사 등을 지냈으며, 1927년 「두 개의 훈시」를 발표한 이래 장편 「먼동이 틀 때」 외 1, 단편집 「취향」등이 있다. 그러나 아직 일본어로 발표한 작품은 없다. 현재 경성부외(府外)에 거주하면서 창작에 정진하고 있다.정인택(鄭人澤)1909년 경성 안강정(安岡町)에서 이조의 시종(侍從) 정운복의 2남으로 태어났다. 경기중학 졸업, 경성제대 예과 중퇴 후 3년 정도 동경에서 지냈다. 1930년 중앙일보의 신년현상소설에 「준비」로 2등에 당선되었으며, 이후 20여편이 넘는 단편을 썼다. 문학잡지 기자 등을 거쳐, 현재 매일신보 기자, 동사에서 발간하는 「화문(和文)주간」 「국민신보」를 편집하면서 창작에 정진하고 있다. 다나카 히데미츠(田中英光)1913년 1월 10일 도쿄시 아카사카(赤坂)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와사키 이데시게(岩崎英重)로 호는 쿄센(鏡川)이며 사료편찬자였다. 쇼난(湘南)중학을 거쳐 1935년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졸업, 같은 해 5월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에서 살고 있다. 중일전쟁 때에는 2번이나 응소(應召)한다. 1940년 9월 「문학계」에 「올림푸스의 과일(オリムポスの果實)」을 발표하며, 1941년 1월 이케타니 신사부로(池谷信三郎)상을 수상한다. 그 외에 장편 「우리는 바다의 아들」이 있다. 현재 조선문인협회 및 일본문학보국회원.유진오(兪鎭午)1906년 경성 태생. 경기중학교를 거쳐 1929년 경성제국대학 문학부 법학과 졸업 후 동학과의 조교 및 예과 강사를 역임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대학 교수 및 법학과 학과장 역임하였다. 대학 졸업 전후로 창작 논평 등을 발표하였으며. 장편 「화상보(華想譜)」, 단편집 「봄(春)」「유진오 단편집」 등이 있다. 최근「남곡(南谷)선생님」등 약간의 일본어 창작물 발표하였으며, 현재 조선문인협회 문학부 상임간사이다. 미야자키 세타로(宮崎清太郎, 본명 : 코다마 킨고(兒玉金吾)1904년 히로시마(広島)현 토요타(豊田)군 미나미가타(南方)촌에서 태어났다. 동경제국대학 문학과를 졸업한 후, 수년 전부터 조선에 와서 현재는 경성 시내의 모 사립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한편 창작에도 정진하고 있다. 소설「아버지의 발을 내리고(父の足を下げて)」「아이와 함께(子と共に)」등을 비롯하여 시나 단가 등도 다수 있다.조용만(趙容萬) 1909년 경성 태생, 1927년 경기중학교 졸업하였다. 경성제국대학 문학예과 입학하여, 1932년 경성제국대학 영문학과 졸업 후 매일신문사 학예부에 입사하였다. 1936년 학예부장으로 승진 후 1940년 3월 매일신문사를 퇴사하였다. 1940년 6월 편집국 위탁으로 재입사 후 사진순보(寫眞旬報) 편집 위촉을 받았다. 1932년 이후 경성욱의전(京城旭醫專) 영어강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현주소는 경성 원서(苑西)동 86-10호.아오키 히로시(青木洪)1908년 황해도 태생으로 어려서 부친을 잃고 가난하여 학교는 2년 밖에 못 다녔다. 애보기, 상점 종업원 등 유소년기부터 남의 집살이를 했다. 이민 집단을 따라 만주로 들어와 일본영사관의 보이, 학교 소사, 시계방 견습생, 마침내는 청진(淸津)에서 막노동까지 하면서 미장일을 배웠다. 미장이 일만은 지금도 수준급이다. 십 수 년 전에 일본으로 건너와 규슈(九州), 오사카(大阪), 동경에서 미장이로 일하면서 문학을 공부했다. 작년 제일서방(第一書房)에서 낸 「밭을 가는 사람들(耕す人々の群)」등이 있다.마키 히로시(牧洋, 이석훈)1907년 평안북도 정주(定州) 태생으로, 평양2중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러시어문학과를 중퇴하였다. 1926~7년 무렵부터 경성일보, 부산일보 등에 일본어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9년 동아일보 신춘 현상 문예부분에 희곡이 당선된 것을 계기로 조선어 창작에 정진하였다. 조선어와 일본어로 된 약 5, 60편의 단편소설과 약간의 희곡을 완성하였다. 그 사이 오사카(大阪)매일신문 통신원, 조선방송협회 아나운서 등을 거쳐, 현재 조선문인협회 상임간사, 녹기(綠旗)일본문화연구소 소속으로 저서로는 창작집 「황혼의 노래(黄昏のうた)」등이 있다. 옮긴이노상래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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