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의 중국이 동남아시아 각국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며 문물을 교류했는지를 보여 줌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는 중국 둔황 석굴의 문서를 발굴한 프랑스의 동양학자이다. 그는 사학자, 문화인류학자, 금석학자, 불교학자, 인도학자, 예술학자, 중국학자, 지리학자 등으로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연구 범위가 매우 방대하다. 실크로드 관련 도서에 반드시 등장하는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는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었다. 이 책은 8세기의 중국이 동남아시아 각국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며 문물을 교류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 남부를 비롯한 동남아 각국의 역사, 문화, 지리, 언어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고증하고 있기에 동서 문화교류사 측면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보적인 연구로 평가된다.
당나라 조정에서 이루어진 가탐(賈耽, 730~805)의 사신 여정을 중심으로 탐구
이 책은 법현, 현장으로 이어지는 인도 구법 여정이 아닌 당나라 조정에서 이루어진 가탐(賈耽, 730~805)의 사신 여정을 중심으로 탐구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각국과의 문물 교류에 근거 자료가 될 내용들이다. 펠리오는 이 연구 과정에서 이전 유럽의 동양학자들(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영국)이 한 선행연구들을 분석하여 정확하게 오류를 바로잡고 있어서, 20세기 이전 유럽 동양학의 역사와 허실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또한 동남아 각국의 언어로 된 비문(碑文)들에 대해 실증적으로 접근하고 있기에, 이 왕국들의 역사 연구에 초석이 된다. 나아가 바다를 매개로 한 통일신라의 외교 관계를 중국 밖의 자료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밖에도 동남아 언어들이 어떻게 한자로 음역되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한자문화권에 있었던 우리의 전통문화를 언어학적으로 연구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인도로 가는 육로와 바다의 두 갈래 길에 대한 펠리오의 연구는 매우 독보적이고 치밀
법현, 현장을 비롯한 승려들의 구법 여정에 따라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길은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 서북쪽 둔황을 지나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남하하여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의 서북쪽으로 가는 길이다. 이 루트는 실크로드를 통한 문물교류 연구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하지만 펠리오는 중국 서남쪽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가탐(賈耽)의 간략한 여정을 역사기록에서 찾아냈다. 그 길은 중앙아시아, 바닷길보다는 훨씬 더 안전한 길이었고 단거리 코스였다. 중국 내륙의 남조왕조, 미얀마 태국 등의 나라를 거쳐야 하고, 험한 산길도 많았지만 중국은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 여정을 따라가며 역사와 문화를 고증했으며, 왜 이 길이 선호되지 않았는지를 규명하였다. 연구의 한편에서는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는 다른 길도 추적해 갔다. 이 바닷길에 대한 연구 역시 20세기 초 가장 ‘학문적’ 접근이었다. 이 두 갈래 길에 대한 펠리오의 고증은 치밀함과 정확함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바닷길에 대한 펠리오의 연구는 중국 남해를 통해 ‘서역’으로 향한 걸음들을 기록한 13세기 이후 저술들의 연구에 토대가 된다.
펠리오의 이 책은 4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은 중국의 서남쪽 방향으로, 가탐이 제시한길을 따라가며,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여정을 기술했다. 2장은 가탐의 여정을 기초로 바다를통해 인도로 가는 길을 서술하고 있다. 3장과 4장은 앞서 다룬 두 갈래 길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종합적으로 정리해 둔 배려가 돋보인다.
펠리오의 전기 학술활동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둔황석굴의 자료 발굴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인도로 간 신라 승려 혜초를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경쟁적 발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구 성과라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전기의 대표적인 연구성과는 『8세기 말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두 갈래 여정(Deux itinéaires de Chine en Inde à la findu VIIIe siècle)』이다. 이 연구는 펠리오가 석학의 반열에 올랐음을 입증하는 성과물이지만 단 한 번도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았다. 번역을 하려면 중국 고문(古文)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미얀마어, 타이어, 베트남어, 말레이어 등 동남아시아 언어들에 대한 기초 지식이 필요하기에 자국의 언어로 소개하는데 많은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펠리오의 제자였던 중국학자 풍승균 씨도 이 책을 중국어로 번역했지만, 주석부분과 부록 등 많은 부분들을 빼먹었을 정도였다.
펠리오의 이 책은 4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은 중국의 서남쪽 방향으로, 가탐이 제시한 길을 따라가며,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여정을 기술했다. 교지(交趾)와 광주를 지리적으로 설명한 다음, 소수민족인 료(獠)와 찬(㸑)에 관한 기록을 검토했다. 이어서 보두(步頭)의 위치를 확인하고, 통킹을 통해 미얀마로 가는 길을 다루었다. 이들과 연관하여 ‘중국’이란 명칭에 대해 살펴본 다음 건창(建昌)으로 가는 길을 추적했다. 다시 운남의 명칭과 인문 지리적 상황을 파악하고, 남조(南詔) 왕들의 이름을 통해 지역의 주류 문화를 읽어내면서, 여수(麗水)와 표국(驃國)을 역사적 기술에 따라 확인해 냈다. 운남 지역에서 미얀마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결국 앞서 언급한 루트들과 만나는 종점을 통해 인도에 이르는 길을 추적했다. 이와는 또 다른 길로, 환주(驩州)에서 환왕(環王)으로 가는 노선을 따라가며, 임읍(林邑)이라는 나라와 그 도읍을 탐색했으며, 점성(占城)을 기술했다. 마지막으로 환주에서 진랍으로 가는 갈림길을 설명했다.
2장은 가탐의 여정을 기초로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는 길을 서술하고 있다. 먼저 광주에서 말라카 해협으로 가는 길을 개괄하고, 특히 논란이 되었던 남해의 나라나 항구도시에 관한 동서양의 선행 연구들을 검토하며 자신의 견해를 기술하고 있다. 곤륜국(崑崙國), 나월(羅越), 단미류(丹眉流), 섬(暹), 나혹(羅斛), 가릉(訶陵), 엽조(葉調), 제박(諸薄), 가라단(訶羅單), 두박(杜薄), 염마나(閻摩那), 바리(婆利), 단단(丹丹), 가릉(訶陵), 승기(僧祇), 다마장(多摩萇), 천지불(千支弗), 사바(闍婆), 그리고 사바와 연관하여 대식(大食), 미려(尾閭), 여인국(女人國), 발니(勃泥), 시력정(柴歷亭) 등을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특히 문화적 관점에서 사바를 기술했고, 사바를 둘러싼 혼용된 명칭들을 규명하려 했다. 이어서 불서(佛逝), 말라유(末羅遊)와 슈리보자, 삼불제(三佛齊)와 수마트라, 갈갈승지국(葛葛僧祗國)에서 사자국(師子國)까지의 여정을 추적했다. 실론, 몰래국(沒來國), 천지불(千支弗), 그리고 가탐이 간 종점을 다루고 있다.
3장과 4장은 앞서 다룬 두 갈래 길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3장은 가탐을 따라 육로로 가는 길이고, 4장은 가탐을 따라 바다로 가는 길이다.
펠리오는 가탐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와는 별개의 자료를 모아 번역하여 첨부했다. 「안남부성(安南府城)에서 양저미(羊苴咩, 대리)까지의 여정」, 「자동(柘東, Yunnansen)에서 양저미(陽苴咩)까지의 여정」,「안녕(安寧, 연난센의 서쪽)에서 통킹과 라오스로 가는 여정」 등을 비롯해, 인도불교 자료에서 언급된 길을 찾아냈고, 8세기 중반까지 중국인들이 언급한 베트남의 24명의 왕을 목록으로 만들어 제시하였다. 마지막 별첨 자료는 이 연구의 대미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당시 펠리오는 프랑스 식민지 장교로서 참과 크메르어 비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에띠엔느 아이모니에(Étienne François Aymonier, 1844~1929)와 부남(扶南)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었다. 펠리오는 이를 염두에 두고, 아이모니에의 선행 연구를 검토하며 오류를 찾아내 반박하며 자기주장의 타당성을 밝혔다. 펠리오가 이러한 비평 문건을 수록한 것은 현지답사와 중국 자료에 대한 철저한 검토 없이 이루어진 당시 유럽의 선행 연구들에 대한 경종으로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