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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도서

8세기 말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두 갈래 여정

" 2021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

지은이폴 펠리오(Paul Peliot) 지음 박세욱 역주

출판일2021-01-15

쪽 수548면

판 형신국판

I S B N978-89-7581-829-5

판매가3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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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8세기의 중국이 동남아시아 각국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며 문물을 교류했는지를 보여 줌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는 중국 둔황 석굴의 문서를 발굴한 프랑스의 동양학자이다. 그는 사학자, 문화인류학자, 금석학자, 불교학자, 인도학자, 예술학자, 중국학자, 지리학자 등으로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연구 범위가 매우 방대하다. 실크로드 관련 도서에 반드시 등장하는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는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었다. 이 책은 8세기의 중국이 동남아시아 각국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며 문물을 교류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 남부를 비롯한 동남아 각국의 역사, 문화, 지리, 언어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고증하고 있기에 동서 문화교류사 측면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보적인 연구로 평가된다. 

 

 

 

당나라 조정에서 이루어진 가탐(賈耽, 730~805)의 사신 여정을 중심으로 탐구

 

이 책은 법현, 현장으로 이어지는 인도 구법 여정이 아닌 당나라 조정에서 이루어진 가탐(賈耽, 730~805)의 사신 여정을 중심으로 탐구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각국과의 문물 교류에 근거 자료가 될 내용들이다. 펠리오는 이 연구 과정에서 이전 유럽의 동양학자들(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영국)이 한 선행연구들을 분석하여 정확하게 오류를 바로잡고 있어서, 20세기 이전 유럽 동양학의 역사와 허실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또한 동남아 각국의 언어로 된 비문(碑文)들에 대해 실증적으로 접근하고 있기에, 이 왕국들의 역사 연구에 초석이 된다. 나아가 바다를 매개로 한 통일신라의 외교 관계를 중국 밖의 자료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밖에도 동남아 언어들이 어떻게 한자로 음역되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한자문화권에 있었던 우리의 전통문화를 언어학적으로 연구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인도로 가는 육로와 바다의 두 갈래 길에 대한 펠리오의 연구는 매우 독보적이고 치밀

 

법현, 현장을 비롯한 승려들의 구법 여정에 따라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길은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 서북쪽 둔황을 지나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남하하여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의 서북쪽으로 가는 길이다. 이 루트는 실크로드를 통한 문물교류 연구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하지만 펠리오는 중국 서남쪽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가탐(賈耽)의 간략한 여정을 역사기록에서 찾아냈다. 그 길은 중앙아시아, 바닷길보다는 훨씬 더 안전한 길이었고 단거리 코스였다. 중국 내륙의 남조왕조, 미얀마 태국 등의 나라를 거쳐야 하고, 험한 산길도 많았지만 중국은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 여정을 따라가며 역사와 문화를 고증했으며, 왜 이 길이 선호되지 않았는지를 규명하였다. 연구의 한편에서는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는 다른 길도 추적해 갔다. 이 바닷길에 대한 연구 역시 20세기 초 가장 ‘학문적’ 접근이었다. 이 두 갈래 길에 대한 펠리오의 고증은 치밀함과 정확함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바닷길에 대한 펠리오의 연구는 중국 남해를 통해 ‘서역’으로 향한 걸음들을 기록한 13세기 이후 저술들의 연구에 토대가 된다. 

 

 

 

펠리오의 이 책은 4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은 중국의 서남쪽 방향으로, 가탐이 제시한길을 따라가며,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여정을 기술했다. 2장은 가탐의 여정을 기초로 바다를통해 인도로 가는 길을 서술하고 있다. 3장과 4장은 앞서 다룬 두 갈래 길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종합적으로 정리해 둔 배려가 돋보인다. 

 

 

 

펠리오의 전기 학술활동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둔황석굴의 자료 발굴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인도로 간 신라 승려 혜초를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경쟁적 발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구 성과라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전기의 대표적인 연구성과는 『8세기 말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두 갈래 여정(Deux itinéaires de Chine en Inde à la findu VIIIe siècle)』이다. 이 연구는 펠리오가 석학의 반열에 올랐음을 입증하는 성과물이지만 단 한 번도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았다. 번역을 하려면 중국 고문(古文)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미얀마어, 타이어, 베트남어, 말레이어 등 동남아시아 언어들에 대한 기초 지식이 필요하기에 자국의 언어로 소개하는데 많은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펠리오의 제자였던 중국학자 풍승균 씨도 이 책을 중국어로 번역했지만, 주석부분과 부록 등 많은 부분들을 빼먹었을 정도였다. 

 

 

 

펠리오의 이 책은 4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은 중국의 서남쪽 방향으로, 가탐이 제시한 길을 따라가며,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여정을 기술했다. 교지(交趾)와 광주를 지리적으로 설명한 다음, 소수민족인 료(獠)와 찬(㸑)에 관한 기록을 검토했다. 이어서 보두(步頭)의 위치를 확인하고, 통킹을 통해 미얀마로 가는 길을 다루었다. 이들과 연관하여 ‘중국’이란 명칭에 대해 살펴본 다음 건창(建昌)으로 가는 길을 추적했다. 다시 운남의 명칭과 인문 지리적 상황을 파악하고, 남조(南詔) 왕들의 이름을 통해 지역의 주류 문화를 읽어내면서, 여수(麗水)와 표국(驃國)을 역사적 기술에 따라 확인해 냈다. 운남 지역에서 미얀마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결국 앞서 언급한 루트들과 만나는 종점을 통해 인도에 이르는 길을 추적했다. 이와는 또 다른 길로, 환주(驩州)에서 환왕(環王)으로 가는 노선을 따라가며, 임읍(林邑)이라는 나라와 그 도읍을 탐색했으며, 점성(占城)을 기술했다. 마지막으로 환주에서 진랍으로 가는 갈림길을 설명했다.

 

 

 

2장은 가탐의 여정을 기초로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는 길을 서술하고 있다. 먼저 광주에서 말라카 해협으로 가는 길을 개괄하고, 특히 논란이 되었던 남해의 나라나 항구도시에 관한 동서양의 선행 연구들을 검토하며 자신의 견해를 기술하고 있다. 곤륜국(崑崙國), 나월(羅越), 단미류(丹眉流), 섬(暹), 나혹(羅斛), 가릉(訶陵), 엽조(葉調), 제박(諸薄), 가라단(訶羅單), 두박(杜薄), 염마나(閻摩那), 바리(婆利), 단단(丹丹), 가릉(訶陵), 승기(僧祇), 다마장(多摩萇), 천지불(千支弗), 사바(闍婆), 그리고 사바와 연관하여 대식(大食), 미려(尾閭), 여인국(女人國), 발니(勃泥), 시력정(柴歷亭) 등을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특히 문화적 관점에서 사바를 기술했고, 사바를 둘러싼 혼용된 명칭들을 규명하려 했다. 이어서 불서(佛逝), 말라유(末羅遊)와 슈리보자, 삼불제(三佛齊)와 수마트라, 갈갈승지국(葛葛僧祗國)에서 사자국(師子國)까지의 여정을 추적했다. 실론, 몰래국(沒來國), 천지불(千支弗), 그리고 가탐이 간 종점을 다루고 있다. 

 

 

 

3장과 4장은 앞서 다룬 두 갈래 길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3장은 가탐을 따라 육로로 가는 길이고, 4장은 가탐을 따라 바다로 가는 길이다. 

 

펠리오는 가탐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와는 별개의 자료를 모아 번역하여 첨부했다. 「안남부성(安南府城)에서 양저미(羊苴咩, 대리)까지의 여정」, 「자동(柘東, Yunnansen)에서 양저미(陽苴咩)까지의 여정」,「안녕(安寧, 연난센의 서쪽)에서 통킹과 라오스로 가는 여정」 등을 비롯해, 인도불교 자료에서 언급된 길을 찾아냈고, 8세기 중반까지 중국인들이 언급한 베트남의 24명의 왕을 목록으로 만들어 제시하였다. 마지막 별첨 자료는 이 연구의 대미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당시 펠리오는 프랑스 식민지 장교로서 참과 크메르어 비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에띠엔느 아이모니에(Étienne François Aymonier, 1844~1929)와 부남(扶南)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었다. 펠리오는 이를 염두에 두고, 아이모니에의 선행 연구를 검토하며 오류를 찾아내 반박하며 자기주장의 타당성을 밝혔다. 펠리오가 이러한 비평 문건을 수록한 것은 현지답사와 중국 자료에 대한 철저한 검토 없이 이루어진 당시 유럽의 선행 연구들에 대한 경종으로 읽을 수 있다.

 

차례

 Ⅰ. 육로로 가는 길

 

 

 

1. 들어가며

 

 

 

2. 교지와 광주

 

 

 

3. 료(獠)와 찬(㸑)

 

 

 

4. 보두(步頭)의 위치

 

 

 

5. 통킹으로 가는 길

 

 

 

6. 미얀마로 가는 길

 

 

 

7. 중국이라는 명칭에 관하여

 

 

 

8. 건창(建昌)으로 가는 길

 

 

 

9. 남조(南詔) 왕국에 관하여

 

 

 

10. 운남의 산스크리트어 명칭

 

 

 

11. 남조 왕들의 이름에 관하여

 

 

 

12. 여수(麗水)와 표국(驃國)

 

 

 

13. 운남에서 미얀마로 가는 두 길

 

 

 

14. 두 길의 종점에서 인도로 가는 길

 

 

 

15. 환주(驩州)에서 환왕(環王)으로 가는 길

 

 

 

16. 임읍의 옛 도읍에 관하여

 

 

 

17. 점성(占城)

 

 

 

18. 환주(驩州)에서 진랍(眞蠟)으로 가는 길

 

 

 

 

 

 

 

Ⅱ. 바다로 가는 길

 

 

 

1. 광주에서 말라카 해협으로

 

 

 

2. 곤륜국(崑崙國)에 관하여

 

 

 

3. 나월(羅越)과 단미류(丹眉流)

 

 

 

4. 섬(暹)과 나혹(羅斛)

 

 

 

5. 가릉(訶陵)과 엽조(葉調)

 

 

 

6. 제박(諸薄)

 

 

 

7. 사바(闍婆)와 가라단(訶羅單)

 

 

 

8. 두박(杜薄)과 염마나(閻摩那)

 

 

 

9. 바리(婆利)와 단단(丹丹)

 

 

 

10. 가릉(訶陵)과 승기(僧祇)

 

 

 

11. 다마장(多摩萇)과 천지불(千支弗)

 

 

 

12. 사바(闍婆)와 대식(大食)

 

 

 

13. 미려(尾閭)와 사바(闍婆)

 

 

 

14. 사바(闍婆)와 여인국(女人國)

 

 

 

15. 사바(闍婆)와 발니(勃泥)

 

 

 

16. 사바(闍婆)와 시력정(柴歷亭) 

 

 

 

17. 문화적 관점에서 본 사바

 

 

 

18. 사바(闍婆)를 둘러싼 명칭의 혼동

 

 

 

19. 불서(佛逝)와 말라유(末羅遊)

 

 

 

20. 마(말)라유와 슈리보자

 

 

 

21. 삼불제(三佛齊)와 수마트라

 

 

 

22. 갈갈승지국(葛葛僧祗國)에서 사자국(師子國)까지

 

 

 

23. 실론

 

 

 

24. 몰래국(沒來國)과 천지불(千支弗)

 

 

 

25. 가탐의 종점

 

 

 

 

 

 


Ⅲ. 가탐(賈耽)에 따라 육로로 가는 길




 




Ⅳ. 가탐에 따라 바다로 가는 길

 

 

 

 

 

 

 

Ⅴ. 별첨자료

 

 

 

1. 안남부성(安南府城)에서 양저미(羊苴咩, 대리)까지의 여정

 

 

 

2. 자동(柘東, Yunnansen)에서 양저미(陽苴咩)까지의 여정

 

 

 

3. 안녕(安寧, 연난센의 서쪽)에서 통킹과 라오스로 가는 여정

 

 

 

4. 인도불교에서 말하는 아리야바르타(Āyāarta)의 동쪽 경계로서의 푼드라바르다나(Punḍravardhana)

 

 

 

5. 8세기 중반까지 중국인들이 언급한 참왕의 임시목록

 

 

 

6. 부남(扶南)과 아이모니에 씨의 설

 

 

 

    

 

 


찾아보기

 

 

 

  역자 후기

책속으로

 서쪽은 동쪽의 끝으로, 동쪽은 서쪽의 끝으로! 두 대륙은 서로의 반대편을 끊임없이 탐구해왔다. 사마천과 반고의 역사기록에는 이러한 ‘서역’으로의 여행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미지 세계의 탐구는 한나라 이후에도 쉼 없이 중국의 사서들 속에 언급되었다. 불교가 동쪽으로 향하면서 이러한 기록들은 사서의 범위를 넘어섰다. 천축(天竺)으로 향하는 구법의 발길들이 이어졌고, 그들의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4~5세기의 법현(法顯)의 일행이 있었고, 7세기에는 현장(玄奘)과 의정(義淨)의 기록이 있다. 8세기에는 펠리오가 둔황 서실에서 찾아낸 자료를 통해 혜초(慧超)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처럼 이들은 모두 천산산맥 남쪽 기슭이나 곤륜산맥 북쪽 기슭을 따라 타클라마칸을 지나 인도로 향하는 발걸음들이었다. 물론 바다를 통해 돌아오는 구법승들도 있었지만, 바다로 돌아오는 여정은 육로의 여정에 비하면 무척 소략하다. 중국의 위치에서 보면 상당히 돌아가는 길임이 분명하다. 이들이 모두 서북쪽 길을 택했다는 것은 그 만큼 여정에 대한 정보가 많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중국의 서남쪽으로 가는 길에 대한 정보가 그만큼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여정을 설명하기 위해…펠리오 씨는 3백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다.…사람들은 그의 훌륭한 논문에 탄복할 것이다. 그는 정말 놀라운 자료들의 중심에서 풍부하게 움직였고, 박식함으로 중국, 인도차이나, 인도의 지리와 관련된 모든 출판물을 익숙하게 하였고, 근거의 완벽한 명료함으로 거의 설명될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었으며, 판단의 정확성으로 가장 어려운 경우에도 가장 그럴법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에두아르 샤반느(Édouard Chavannes, 1865~1918)

 

 

 

“아무것도 막을 수 없는, 아니 모든 것을 멈추게 한다. 중국의 옛 명칭들, 시암, 실론, 말레이군도, 말레이시아의 기원, 강태(康泰), 현장(玄奘), 의정(義淨), 마르코 폴로의 여행들, 이 모든 탐험가의 운명은 언제나 그를 유혹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처럼 풀어야 할 난제들에 사로잡혀 미지의 세계로 나갔기 때문이다!” -폴 드미에빌(Paul Demiéville, 1894~1979)

 

저자소개

저자│폴 펠리오(Paul Pelliot)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는 프랑스 동양학자이자 언어학자이다. 에두아르 샤반느(Éouard Chavannes)의 소개로 저명한 동양학자 실뱅 레비(Sylvain Léi)의 제자가 된다. 어학 능력이 뛰어나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 등 13개 언어를 구사했다. 극동프랑스학교(Éole Françise d’Extrême-Orient)의 유급연구생이 되어 1900년 하노이로 갔고, 곧바로 중국 도서를 확보하기 위해 북경으로 여행했다. 마침 의화단 사건이 발발하여 프랑스 대표부를 방어하는 군사작전에 참여했는데, 그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후 겨우 23세의 나이로 극동프랑스학교 중국 문학 교수가 되었다. 1906년 6월 중앙아시아 탐사대를 이끌고 카슈갈에 도착하여, 툼슈크, 쿠차, 투루판, 둔황 막고굴을 탐사했다. 둔황 장경동에서 일일이 확인하며 선별한 6000여 필사본을 얻어냈다. 이러한 펠리오의 행운과 탁월한 혜안은 프랑스를 유럽 중국학의 중심으로 이끌었고, 20세기 동서양의 중국학계를 둔황학으로 향하게 했다. 1909년 프랑스로 돌아온 1911년부터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e de France)에서 중앙아시아, 역사, 문화, 언어의 교수로 활동했고 1920년부터는 유럽 중국학의 산실인 『통보(T’oung Pao)』를 앙리 꼬르디에(Henri Cordier)와 함께 편집했으며,는 금석문 및 문학 아카데미(Acadé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의 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0년부터는 파리 엔느리(Ennery) 박물관장을 역임했다.

 

 


옮긴이│박세욱

 

박세욱은 프랑스 E.P.H.E. IV(파리 소르본)에서 둔황 문학과 예술로 박사학위(2001)를 받고, 귀국하여 동서양 문화교류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소개하는 일에 전념하는 독서인이다. 역서로는 『돈황 이야기』(공역), 『실크로드』, 『중국의 시와 그림 그리고 정치』(공역), 『안득장자언』, 『바다의 왕국들: 제번지 역주』 등이 있다.

 

서평

책소개

8세기의 중국이 동남아시아 각국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며 문물을 교류했는지를 보여 줌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는 중국 둔황 석굴의 문서를 발굴한 프랑스의 동양학자이다. 그는 사학자, 문화인류학자, 금석학자, 불교학자, 인도학자, 예술학자, 중국학자, 지리학자 등으로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연구 범위가 매우 방대하다. 실크로드 관련 도서에 반드시 등장하는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는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었다. 이 책은 8세기의 중국이 동남아시아 각국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며 문물을 교류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 남부를 비롯한 동남아 각국의 역사, 문화, 지리, 언어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고증하고 있기에 동서 문화교류사 측면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독보적인 연구로 평가된다. 

 

 

 

당나라 조정에서 이루어진 가탐(賈耽, 730~805)의 사신 여정을 중심으로 탐구

 

이 책은 법현, 현장으로 이어지는 인도 구법 여정이 아닌 당나라 조정에서 이루어진 가탐(賈耽, 730~805)의 사신 여정을 중심으로 탐구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각국과의 문물 교류에 근거 자료가 될 내용들이다. 펠리오는 이 연구 과정에서 이전 유럽의 동양학자들(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영국)이 한 선행연구들을 분석하여 정확하게 오류를 바로잡고 있어서, 20세기 이전 유럽 동양학의 역사와 허실을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또한 동남아 각국의 언어로 된 비문(碑文)들에 대해 실증적으로 접근하고 있기에, 이 왕국들의 역사 연구에 초석이 된다. 나아가 바다를 매개로 한 통일신라의 외교 관계를 중국 밖의 자료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밖에도 동남아 언어들이 어떻게 한자로 음역되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한자문화권에 있었던 우리의 전통문화를 언어학적으로 연구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인도로 가는 육로와 바다의 두 갈래 길에 대한 펠리오의 연구는 매우 독보적이고 치밀

 

법현, 현장을 비롯한 승려들의 구법 여정에 따라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길은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 서북쪽 둔황을 지나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남하하여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의 서북쪽으로 가는 길이다. 이 루트는 실크로드를 통한 문물교류 연구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하지만 펠리오는 중국 서남쪽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가탐(賈耽)의 간략한 여정을 역사기록에서 찾아냈다. 그 길은 중앙아시아, 바닷길보다는 훨씬 더 안전한 길이었고 단거리 코스였다. 중국 내륙의 남조왕조, 미얀마 태국 등의 나라를 거쳐야 하고, 험한 산길도 많았지만 중국은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 여정을 따라가며 역사와 문화를 고증했으며, 왜 이 길이 선호되지 않았는지를 규명하였다. 연구의 한편에서는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는 다른 길도 추적해 갔다. 이 바닷길에 대한 연구 역시 20세기 초 가장 ‘학문적’ 접근이었다. 이 두 갈래 길에 대한 펠리오의 고증은 치밀함과 정확함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바닷길에 대한 펠리오의 연구는 중국 남해를 통해 ‘서역’으로 향한 걸음들을 기록한 13세기 이후 저술들의 연구에 토대가 된다. 

 

 

 

펠리오의 이 책은 4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은 중국의 서남쪽 방향으로, 가탐이 제시한길을 따라가며,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여정을 기술했다. 2장은 가탐의 여정을 기초로 바다를통해 인도로 가는 길을 서술하고 있다. 3장과 4장은 앞서 다룬 두 갈래 길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종합적으로 정리해 둔 배려가 돋보인다. 

 

 

 

펠리오의 전기 학술활동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둔황석굴의 자료 발굴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인도로 간 신라 승려 혜초를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경쟁적 발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연구 성과라고는 볼 수 없다. 따라서 전기의 대표적인 연구성과는 『8세기 말 중국에서 인도로 가는 두 갈래 여정(Deux itinéaires de Chine en Inde à la findu VIIIe siècle)』이다. 이 연구는 펠리오가 석학의 반열에 올랐음을 입증하는 성과물이지만 단 한 번도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았다. 번역을 하려면 중국 고문(古文) 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미얀마어, 타이어, 베트남어, 말레이어 등 동남아시아 언어들에 대한 기초 지식이 필요하기에 자국의 언어로 소개하는데 많은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펠리오의 제자였던 중국학자 풍승균 씨도 이 책을 중국어로 번역했지만, 주석부분과 부록 등 많은 부분들을 빼먹었을 정도였다. 

 

 

 

펠리오의 이 책은 4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은 중국의 서남쪽 방향으로, 가탐이 제시한 길을 따라가며, 육로를 통해 인도로 가는 여정을 기술했다. 교지(交趾)와 광주를 지리적으로 설명한 다음, 소수민족인 료(獠)와 찬(㸑)에 관한 기록을 검토했다. 이어서 보두(步頭)의 위치를 확인하고, 통킹을 통해 미얀마로 가는 길을 다루었다. 이들과 연관하여 ‘중국’이란 명칭에 대해 살펴본 다음 건창(建昌)으로 가는 길을 추적했다. 다시 운남의 명칭과 인문 지리적 상황을 파악하고, 남조(南詔) 왕들의 이름을 통해 지역의 주류 문화를 읽어내면서, 여수(麗水)와 표국(驃國)을 역사적 기술에 따라 확인해 냈다. 운남 지역에서 미얀마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결국 앞서 언급한 루트들과 만나는 종점을 통해 인도에 이르는 길을 추적했다. 이와는 또 다른 길로, 환주(驩州)에서 환왕(環王)으로 가는 노선을 따라가며, 임읍(林邑)이라는 나라와 그 도읍을 탐색했으며, 점성(占城)을 기술했다. 마지막으로 환주에서 진랍으로 가는 갈림길을 설명했다.

 

 

 

2장은 가탐의 여정을 기초로 바다를 통해 인도로 가는 길을 서술하고 있다. 먼저 광주에서 말라카 해협으로 가는 길을 개괄하고, 특히 논란이 되었던 남해의 나라나 항구도시에 관한 동서양의 선행 연구들을 검토하며 자신의 견해를 기술하고 있다. 곤륜국(崑崙國), 나월(羅越), 단미류(丹眉流), 섬(暹), 나혹(羅斛), 가릉(訶陵), 엽조(葉調), 제박(諸薄), 가라단(訶羅單), 두박(杜薄), 염마나(閻摩那), 바리(婆利), 단단(丹丹), 가릉(訶陵), 승기(僧祇), 다마장(多摩萇), 천지불(千支弗), 사바(闍婆), 그리고 사바와 연관하여 대식(大食), 미려(尾閭), 여인국(女人國), 발니(勃泥), 시력정(柴歷亭) 등을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특히 문화적 관점에서 사바를 기술했고, 사바를 둘러싼 혼용된 명칭들을 규명하려 했다. 이어서 불서(佛逝), 말라유(末羅遊)와 슈리보자, 삼불제(三佛齊)와 수마트라, 갈갈승지국(葛葛僧祗國)에서 사자국(師子國)까지의 여정을 추적했다. 실론, 몰래국(沒來國), 천지불(千支弗), 그리고 가탐이 간 종점을 다루고 있다. 

 

 

 

3장과 4장은 앞서 다룬 두 갈래 길의 여정을 일목요연하게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3장은 가탐을 따라 육로로 가는 길이고, 4장은 가탐을 따라 바다로 가는 길이다. 

 

펠리오는 가탐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는 자료와는 별개의 자료를 모아 번역하여 첨부했다. 「안남부성(安南府城)에서 양저미(羊苴咩, 대리)까지의 여정」, 「자동(柘東, Yunnansen)에서 양저미(陽苴咩)까지의 여정」,「안녕(安寧, 연난센의 서쪽)에서 통킹과 라오스로 가는 여정」 등을 비롯해, 인도불교 자료에서 언급된 길을 찾아냈고, 8세기 중반까지 중국인들이 언급한 베트남의 24명의 왕을 목록으로 만들어 제시하였다. 마지막 별첨 자료는 이 연구의 대미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당시 펠리오는 프랑스 식민지 장교로서 참과 크메르어 비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에띠엔느 아이모니에(Étienne François Aymonier, 1844~1929)와 부남(扶南)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었다. 펠리오는 이를 염두에 두고, 아이모니에의 선행 연구를 검토하며 오류를 찾아내 반박하며 자기주장의 타당성을 밝혔다. 펠리오가 이러한 비평 문건을 수록한 것은 현지답사와 중국 자료에 대한 철저한 검토 없이 이루어진 당시 유럽의 선행 연구들에 대한 경종으로 읽을 수 있다.

 

차례

 Ⅰ. 육로로 가는 길

 

 

 

1. 들어가며

 

 

 

2. 교지와 광주

 

 

 

3. 료(獠)와 찬(㸑)

 

 

 

4. 보두(步頭)의 위치

 

 

 

5. 통킹으로 가는 길

 

 

 

6. 미얀마로 가는 길

 

 

 

7. 중국이라는 명칭에 관하여

 

 

 

8. 건창(建昌)으로 가는 길

 

 

 

9. 남조(南詔) 왕국에 관하여

 

 

 

10. 운남의 산스크리트어 명칭

 

 

 

11. 남조 왕들의 이름에 관하여

 

 

 

12. 여수(麗水)와 표국(驃國)

 

 

 

13. 운남에서 미얀마로 가는 두 길

 

 

 

14. 두 길의 종점에서 인도로 가는 길

 

 

 

15. 환주(驩州)에서 환왕(環王)으로 가는 길

 

 

 

16. 임읍의 옛 도읍에 관하여

 

 

 

17. 점성(占城)

 

 

 

18. 환주(驩州)에서 진랍(眞蠟)으로 가는 길

 

 

 

 

 

 

 

Ⅱ. 바다로 가는 길

 

 

 

1. 광주에서 말라카 해협으로

 

 

 

2. 곤륜국(崑崙國)에 관하여

 

 

 

3. 나월(羅越)과 단미류(丹眉流)

 

 

 

4. 섬(暹)과 나혹(羅斛)

 

 

 

5. 가릉(訶陵)과 엽조(葉調)

 

 

 

6. 제박(諸薄)

 

 

 

7. 사바(闍婆)와 가라단(訶羅單)

 

 

 

8. 두박(杜薄)과 염마나(閻摩那)

 

 

 

9. 바리(婆利)와 단단(丹丹)

 

 

 

10. 가릉(訶陵)과 승기(僧祇)

 

 

 

11. 다마장(多摩萇)과 천지불(千支弗)

 

 

 

12. 사바(闍婆)와 대식(大食)

 

 

 

13. 미려(尾閭)와 사바(闍婆)

 

 

 

14. 사바(闍婆)와 여인국(女人國)

 

 

 

15. 사바(闍婆)와 발니(勃泥)

 

 

 

16. 사바(闍婆)와 시력정(柴歷亭) 

 

 

 

17. 문화적 관점에서 본 사바

 

 

 

18. 사바(闍婆)를 둘러싼 명칭의 혼동

 

 

 

19. 불서(佛逝)와 말라유(末羅遊)

 

 

 

20. 마(말)라유와 슈리보자

 

 

 

21. 삼불제(三佛齊)와 수마트라

 

 

 

22. 갈갈승지국(葛葛僧祗國)에서 사자국(師子國)까지

 

 

 

23. 실론

 

 

 

24. 몰래국(沒來國)과 천지불(千支弗)

 

 

 

25. 가탐의 종점

 

 

 

 

 

 


Ⅲ. 가탐(賈耽)에 따라 육로로 가는 길




 




Ⅳ. 가탐에 따라 바다로 가는 길

 

 

 

 

 

 

 

Ⅴ. 별첨자료

 

 

 

1. 안남부성(安南府城)에서 양저미(羊苴咩, 대리)까지의 여정

 

 

 

2. 자동(柘東, Yunnansen)에서 양저미(陽苴咩)까지의 여정

 

 

 

3. 안녕(安寧, 연난센의 서쪽)에서 통킹과 라오스로 가는 여정

 

 

 

4. 인도불교에서 말하는 아리야바르타(Āyāarta)의 동쪽 경계로서의 푼드라바르다나(Punḍravardhana)

 

 

 

5. 8세기 중반까지 중국인들이 언급한 참왕의 임시목록

 

 

 

6. 부남(扶南)과 아이모니에 씨의 설

 

 

 

    

 

 


찾아보기

 

 

 

  역자 후기

책속으로

 서쪽은 동쪽의 끝으로, 동쪽은 서쪽의 끝으로! 두 대륙은 서로의 반대편을 끊임없이 탐구해왔다. 사마천과 반고의 역사기록에는 이러한 ‘서역’으로의 여행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미지 세계의 탐구는 한나라 이후에도 쉼 없이 중국의 사서들 속에 언급되었다. 불교가 동쪽으로 향하면서 이러한 기록들은 사서의 범위를 넘어섰다. 천축(天竺)으로 향하는 구법의 발길들이 이어졌고, 그들의 기록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4~5세기의 법현(法顯)의 일행이 있었고, 7세기에는 현장(玄奘)과 의정(義淨)의 기록이 있다. 8세기에는 펠리오가 둔황 서실에서 찾아낸 자료를 통해 혜초(慧超)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처럼 이들은 모두 천산산맥 남쪽 기슭이나 곤륜산맥 북쪽 기슭을 따라 타클라마칸을 지나 인도로 향하는 발걸음들이었다. 물론 바다를 통해 돌아오는 구법승들도 있었지만, 바다로 돌아오는 여정은 육로의 여정에 비하면 무척 소략하다. 중국의 위치에서 보면 상당히 돌아가는 길임이 분명하다. 이들이 모두 서북쪽 길을 택했다는 것은 그 만큼 여정에 대한 정보가 많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중국의 서남쪽으로 가는 길에 대한 정보가 그만큼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여정을 설명하기 위해…펠리오 씨는 3백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다.…사람들은 그의 훌륭한 논문에 탄복할 것이다. 그는 정말 놀라운 자료들의 중심에서 풍부하게 움직였고, 박식함으로 중국, 인도차이나, 인도의 지리와 관련된 모든 출판물을 익숙하게 하였고, 근거의 완벽한 명료함으로 거의 설명될 수 없는 문제들을 다루었으며, 판단의 정확성으로 가장 어려운 경우에도 가장 그럴법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에두아르 샤반느(Édouard Chavannes, 1865~1918)

 

 

 

“아무것도 막을 수 없는, 아니 모든 것을 멈추게 한다. 중국의 옛 명칭들, 시암, 실론, 말레이군도, 말레이시아의 기원, 강태(康泰), 현장(玄奘), 의정(義淨), 마르코 폴로의 여행들, 이 모든 탐험가의 운명은 언제나 그를 유혹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처럼 풀어야 할 난제들에 사로잡혀 미지의 세계로 나갔기 때문이다!” -폴 드미에빌(Paul Demiéville, 1894~1979)

 

저자소개

저자│폴 펠리오(Paul Pelliot)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는 프랑스 동양학자이자 언어학자이다. 에두아르 샤반느(Éouard Chavannes)의 소개로 저명한 동양학자 실뱅 레비(Sylvain Léi)의 제자가 된다. 어학 능력이 뛰어나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 티베트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 등 13개 언어를 구사했다. 극동프랑스학교(Éole Françise d’Extrême-Orient)의 유급연구생이 되어 1900년 하노이로 갔고, 곧바로 중국 도서를 확보하기 위해 북경으로 여행했다. 마침 의화단 사건이 발발하여 프랑스 대표부를 방어하는 군사작전에 참여했는데, 그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후 겨우 23세의 나이로 극동프랑스학교 중국 문학 교수가 되었다. 1906년 6월 중앙아시아 탐사대를 이끌고 카슈갈에 도착하여, 툼슈크, 쿠차, 투루판, 둔황 막고굴을 탐사했다. 둔황 장경동에서 일일이 확인하며 선별한 6000여 필사본을 얻어냈다. 이러한 펠리오의 행운과 탁월한 혜안은 프랑스를 유럽 중국학의 중심으로 이끌었고, 20세기 동서양의 중국학계를 둔황학으로 향하게 했다. 1909년 프랑스로 돌아온 1911년부터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e de France)에서 중앙아시아, 역사, 문화, 언어의 교수로 활동했고 1920년부터는 유럽 중국학의 산실인 『통보(T’oung Pao)』를 앙리 꼬르디에(Henri Cordier)와 함께 편집했으며,는 금석문 및 문학 아카데미(Acadé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의 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0년부터는 파리 엔느리(Ennery) 박물관장을 역임했다.

 

 


옮긴이│박세욱

 

박세욱은 프랑스 E.P.H.E. IV(파리 소르본)에서 둔황 문학과 예술로 박사학위(2001)를 받고, 귀국하여 동서양 문화교류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소개하는 일에 전념하는 독서인이다. 역서로는 『돈황 이야기』(공역), 『실크로드』, 『중국의 시와 그림 그리고 정치』(공역), 『안득장자언』, 『바다의 왕국들: 제번지 역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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