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학술의 자존심과 독보적 세계관의 탄생
19세기 조선의 지적 지형에서 혜강 최한기(惠崗 崔漢綺, 1803~1877)가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이다. 그는 성리학적 교조주의가 지독하게 지배하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고, 서구의 과학적 방법론과 동양의 전통적인 기 철학을 창조적으로 결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학문 체계인 ‘기학(氣學)’을 정립하였다. 특히 1857년 서문을 갖춘 『지구전요(地球典要)』는 단순한 세계 지리서를 넘어, 당대 최신의 천문학, 기상학, 인문지리학을 총망라한 백과사전적 저술로서,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을 근본적으로 쇄신한 기념비적 저작이라 해도 전혀 무리하지 않다. 그가 직접 쓴 ‘지구전요’ 네 글자는 이에 정확히 부합한다.
『지구전요』의 구성과 그 가치
역자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여기 소개하는 『지구전요』는 하버드 옌칭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 초고이자 친필이다. 이 책은 최한기가 ‘기’로 바라보고 그에 따라 파악한 세계관을 천문, 지리, 인문에서 구체화한 결과물이다. 혜강은 당시 최신 자료였던 위원(魏源, 1794~1857)의 『해국도지(海國圖志)』(1842년)를 입수해 읽었다. 그런 다음 연이어 나온 서계여(徐繼畬, 1795~1873)의 『영환지략(瀛環志略)』(1850년)을 독파했다. 최한기는 위원의 장황함을 서계여의 간결함으로 달랬다. 그는 자신이 읽은 ‘세계’를 기술할 모델로, 『영환지략』을 선택했다. 그 기준은 정보의 정확도였다. 혜강은 『영환지략』을 중심에 두고, 자신만의 서술 카테고리를 설정했다. 그런 다음 『영환지략』을 해부하여, ‘장점’만 골라 뽑고, 그 소략한 정보를 『해국도지』를 통해 살찌웠다. 많은 것에서 빼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에다 정보를 보태는 탁월한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결코 단순하게 복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독보적 이해와 비평적 주석을 곁들였으며, 원서의 오류를 바로잡기도 했다. 최한기가 집필할 당시만 해도,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산해경』에나 나오는 이상한 나라들로 그려진, 소위 「천하도」가 유행하고 있었다. 최한기는 이러한 중화 중심의 폐쇄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계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실증이 바로, 물론 『영환지략』의 지도를 복제했지만,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오늘날과 다름없이 그려 소개한 「지구전·후도」일 것이다.
동학과 서학의 한가운데에서
최한기는 19세기 하나뿐인 연표를 써서 그렸다. 과거에서 현재가 아니라,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으로 작성했다. 그로써 혜강은 요임금 순임금의 아득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다. 이러한 그의 뜻은 로마자 알파벳 소개에서 구체화했다. 세계의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혜강은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 있는 이해를 보여주었다. 최한기의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대한 이해와 비판은 이 책의 하이라이트다. 그것은 감정적 비판이 아니라, 연관 도서의 철저한 독서와 논리적 판단에서 이루어졌다. “부질없이 유형과 무형의 사이에서 분쟁했으니, 무한한 병의 뿌리는 여기에서 생겨났다. …인간, 사물, 수풀 각기 부여받은 성질에 따라, 움직임이 어지럽고, 시시각각 천만 변화하는데, 진재(眞宰)가 어찌 남김없이 살필 수 있겠는가. …잡학(雜學)이 일어나는 이유는 견문이 고루했기 때문이고, 잡학이 치성하는 이유는 복을 쫓고 화를 피했기 때문이며, 잡학이 소멸하는 이유는 상도(常道)가 점차 밝아졌기 때문이다. 어찌 천 년, 천 명이 쟁론하여 분별해 낼 수 있으리오. 우주 사람들의 증험을 거치기를 기다려야 더불어 밝아지고 더불어 펼쳐지는 것이다. 지구의 기화를 자세히 계산하여 경상이 밝아지면, 공허하고 신기하며, 화복을 구하고 면하는 학문은 공격하여 물리치지 않아도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